종교 권위에 대한 도시들의 반항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한 도시 공화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계 스위스종교개혁은 울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다.
2. 개혁가 쯔빙글리의 생애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2달 늦은 1484년 1월 1일 쮜리히에서 64 km 정도 떨어진 토겐부르크(
부르죠아적인 도시 의회들이 교회의 행정 조직에 대항하여 점차 더욱 많은 권한을 요구함으로서 중세의 봉건적 종교 권위에 대한 도시들의 반항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한 도시 공화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계 스위스종교개혁은 울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다.
검을 든 개혁자, "쯔빙글리"
♧흔히 16C 종교개혁을 말할 때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종교개혁의 주인공이 있으니, 그가 바로 쯔빙글리이다.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 뒤편으로 비슷한 시기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노바라 전투와 마리그나노 전토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1세에게 스위스 군대가 패배한 뒤,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중립을 권장했는데 이것이 교구신도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그는 글라루스를 보좌신부에게 맡기고 떠나 1516년 아인지델른에 설교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신봉자들은 복음파(Evangelicals)라는 이름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t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루터(1483경~1546)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울리